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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를 받지 아니한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

    세례요한은 오실 메시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사명으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했습니다. 당시에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요한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는 요한의 세례를 거부합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누가복음 7장30절.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세례요한이 전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것과 그로 인해서 구원자가 도래할 것, 회개해야 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 ‘성령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요한의 세례’를,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저버리다’는 ‘아데테오(ἀθετέω)’로, ‘거부하다, 인정하지 않다’의 뜻입니다. 성경은 이들이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은 것이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 모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입니다. 이 구원의 계획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계획은 다른 길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 믿지 않는 것은 구원의 계획,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이 완성됨은 구약의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메시야’, ‘그리스도’에 대한 ‘대망(待望)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에 통달하고, 그것을 가르쳐야 하는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신앙은 내가 얼마나 교회와 성경과 가까이에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내가 깨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깨어 있어야 상황을 정확하게 볼 수 있고, 깨어 있어야 들려지고하나님의 말씀이 그냥 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겁니다. 또한 이들이 예수님을 거부할 수밖에 없던 상황은 그들이 누리는 환경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선생으로, 지도자로 추앙받는 그 위치가 마치 권력이 되어 버렸습니다.      분명 그들의 위치는 권력이 아니라 말씀으로 섬기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권력으로 생각함으로 자신들을 드러내는 수단, 자신들을 나타내는 방식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래서 말씀의 의미보다는 그 말씀을 빙자해서 말씀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시키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거룩한 예배가 드려지고, 순결한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는 성전에서 돈을 주고 받으면서 이익을 취하고, 불법적인 거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전이며, 하나님께 예배 드려지는 거룩하게 구별된 곳이라는 생각이 있었다면 그 곳에서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고, 권력을 부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사역을 위해서 예루살렘에 오셔서 잡히시고, 고난받으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신 날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날에 외식도 하지 않고, TV, 인터넷도 금해야 하며, 즐거운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금식을 하며, 얼굴을 어둡게 하고 다닙니다. 물론 이런 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행동이 또 다른 나의 의로움과 나의 존재를 나타내는 수단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요? 그러면서 나처럼 하지 않는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묵상입니다. 나의 나 됨은 권력도, 물질도, 명예도 아닙니다. 뭔가 의로워 보이는 행동도 아닙니다. 나의 나 됨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나의 나 됨이 나의 수고가 될 때에는 하나님의 은’임을 잊어 버립니다. 나의 나 됨이 권력, 명예, 물질이라면 내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잊어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를 잊어버리는 것은 한순간 잠깐 잊어버리는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왜곡하고, 신앙도 왜곡된 신앙으로 살면서 그것이 옳은 것으로 착각하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처럼 그리스도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참된 진리인지,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바로 깨달아 아는 삶으로 주님의 은혜, 그리스도 예수를 바로 알고, 믿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 / 더비전교회 윤우식 목사바리새인 세례 율법 교사들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 그리스도이신

2024-03-29

[열린광장] ‘빈 무덤’, 예수 부활의 현장

이제 부활절이다. ‘부활’은 인류 역사의 최고 정점이다. 누구나 예외 없이 맞이할 수밖에 없는 죽음을 쳐부수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이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대 사건이다. 바로 기적 그 자체다. 인류 역사에서 이같은 기적이 일어난 적이 언제 또 있었던가.     예수 부활은 그래서 단 하나, 유일무이한 패러다임인 인류 역사의 정점이 될 수밖에 없는 최대의 대사건이다. 그래서일까? 2000년의 긴 시간을 보내면서도 많은 사람이 그 사건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워낙 그 사건 자체가 믿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진짜인지 ‘증거(?)’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 오죽했으면 3년간을 함께 생활했던 당시 그분의 제자 토마스마저도 직접 눈으로 그분의 상처를 확인하고서야  어렵사리 스승의 부활을 믿게 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증거는 너무나 단순하고 확실하게 드러나 있다. 너무나 단순하기에 오히려 간과하기 쉬운 증거 말이다. 그것은 바로 ‘빈 무덤’ 이다.     무덤은 ‘죽음’의 상징이다. 무덤을 보면서 아무도 그 안에 묻혀 있는 사람의 주검을 의심하지 않는다. 무덤 자체가 바로 죽음의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서 안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장황한 과학적 증거가 아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분의 시신이 묻힌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한마디로 나와 있다.   그 까닭에  ‘빈 무덤’은 부활절을 맞는 우리 모두에게 부활의 기쁨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갖게 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의 해방이기에 우리는 기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무시무시한 죽음의 원인인 질병과 사고, 재난, 실패와 좌절, 절망과 공포마저도 우리를 가두어 놓지 못한다는 ‘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내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어떤 처지에서도 항상 기뻐하십시오! 항상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언제나 기도하십시오( 데살로니까 전서5:16)”라고 일깨워 주시고 있는 것 아닐까.   모두 행복한 부활절 보내세요!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김재동 / 가톨릭 종신부제열린광장 무덤 예수 예수 부활 예수 그리스도 무덤 자체

2024-03-28

[삶과 추억] 외롭고 지친 이들 위로한 사역자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이하 마가교회)를 이끌어 온 채동선(사진) 전도사가 15일 오전 4시 48분 카이저병원에서 별세했다. 62세.   유가족에 따르면 고인은 그동안 위암으로 투병하다 암이 간 등으로 전이돼 숨을 거뒀다.   고인은 생전 마가교회를 LA와 오렌지카운티 두 곳에 개척해 전도 활동에 앞장섰다. 지난 22년 동안 마가교회를 이끌며 이민생활 가운데 외롭고 힘겨움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고인은 한국에서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내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30대 때 사업실패와 우울증에 시달린 뒤 신학에 매진해 마가교회를 개척했다.     고인은 지난해 1월 신년말씀 집회 때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지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사랑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평소 “내 묘비병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하나님이 용서한 자’라고 적고 싶다. 내가 아닌 하나님을 드러내는 자로 살고 싶다”고 말해왔다.   고인은 총신에서 헌법과 교회사를 가르친 채기은 목사의 손자,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한 채정민 목사의 증손자다. 유가족으로는 아내가 있다. 고인 장례 일정은 현재 협의 중이다.     ▶연락처: (626)786-1814 김형재 기자삶과 추억 사역자 위로 생전 마가교회 예수 그리스도 이하 마가교회

2024-01-15

[열린광장] 성탄일(日) 과 성탄지(地)

달력의 마지막 달 12월이 되니 여기저기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려온다.  크리스마스는 12월 25일이지만 사람들은 벌써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고 들썩인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리는 성탄절이지만 예수가 태어난 날짜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가 태어난 베들레헴도 다윗 임금 때는 이스라엘 땅이었지만 지금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5마일  떨어져 있는 요르단에 속해 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인 예수의 탄생지인 베들레헴보다는 탄생일인지 확실치 않은 12월 25일이 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예수의 탄생지인 베들레헴의 중요성은 찬송가의 가사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오 베들레헴 너 작은 골 너 잠들었느냐, 온 하늘 두루 비춘 줄 너 어찌 모르나.”  “우리 임금 주 우리 모두 절하세,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베들레헴에 나셨네.” “그 한 별이 베들레헴 향하여 바로 오더니,  아기 예수 누우신 집 그 위에 오자 멈췄네.”  “ 천사 찬송하기를 거룩하신 구주께,  영광 받을 왕의 왕 베들레헴에 나신 주”   여기서 베들레헴은 히브리어로 ‘빵(식량)의 집’, 아랍어로는 ‘고기(육류)의 집’ 이란 뜻인데 이런 곳에서  영혼의 양식인 예수가 탄생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아무튼 예수가 탄생한 베들레헴은 조용하지만 그가 활동했던 예루살렘이 속한 이스라엘은 지금 전쟁터가 되어 있으니 그 까닭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가 기리는 12월 25일은 A. D. 336년의 로마 달력에 처음으로 나타났으며 이때 처음 예수의 성탄일로 경축한 날이다. 다만 예수는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던 헤롯 대왕 때에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12월 25일에 태어난 사람 가운데는 훌륭한 업적을 남긴 두 사람이 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영국의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과 미국의 적십자사를 창설한 클라라 발톤이다. 이들을 기억하면 예수의 탄생일이 좀 더 뜻깊은 명절이 될 성싶다.     뉴턴은 1642년 12월 25일에 린컨숴에서 태어났다.  그는 트리니티 칼리지와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왔고 연금술을 연구하고 나중에 신학과 성서 연대기를 연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뉴턴은 로열 소사이어티의 총장이 되었고 앤 여왕으로부터 ‘나이트’ 작위를 받았다. 1727년 숨진 뉴턴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미국적십자사를 세운 발톤은 많은 사람으로 부터 ‘전장(戰場)의 천사’ 란 애칭으로 불릴 만큼 많은 부상병과 환자를 돌본 여성이다.  그녀는 1821년 12월 25일에 태어났다. 발톤은 미국도 전쟁 희생자 보호를 위한 ‘제네바 협약’을 비준하도록 노력했고. 그 결과 미국도 1882년 이를 비준했다. 그녀는 많은 책을 저술했는데 그 가운데 ‘The Red Cross’가  가장 유명하다.          성탄절이 다가오지만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이 지속하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  라디오나 TV에서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지만 슬픈 성탄절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예수가 탄생한 날을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맞이하면서….      윤경중 / 연세목회자회 증경회장열린광장 성탄일 성탄지 탄생지인 베들레헴 예수 그리스도 크리스마스 캐럴

2023-12-14

[열린광장] 이름에 담긴 의미

1910년 대한제국과 일본의 병합조약으로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게 되었고 이후 우리는 호적의 성을 바꿔야 하는 고통까지 겪었다. 나도 호적에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변씨(卞氏)라는 성 대신 일본인이 만들어 준 도쿠야마(德山)라는 일본식 성으로 기재가 됐었다. 이 치욕스러운 일이 일제 치하에 겪었던 창씨개명(創氏改名)이다.     미국에 와서 첫 직장을 얻었는데 당시 루스라는 이름의 부사장이 내게 베드로라는 이름의 명찰을 만들어 주었다.  루스는 회사 내에서는 동료들이 쉽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필요하고 내가 베드로를 닮은 데가 있다며 이유를 설명했다. 백인인 루스는 직장 상사였지만 내가 미국에 빨리 정착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준 분이었다.     사실 당시 나도 미국식인 직장 동료들의 이름을 기억하기가 쉽지 않았다. 얼굴은 알지만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당황한 적도 많았다. 차라리 내가 부르기 쉽게 그들의 이름을 지어줬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나는 1978년에 시민권을 취득하며 미국 이름을 ‘베드로’로 했다. 당시 아내는 ‘바버라’, 딸은 ‘버지니아’, 아들은 ‘로이’ 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하지만 이는 강제가 아닌 자발적인 개명이었다. 아버님이 지어준 이름을 바꾼다는 죄스러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새 이름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다.     당시 나는 ‘베드로’ 라는 성경의 인물에 대해 깊이 알지 못했다. 그 후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벽기도를 다니는데 어느 집 앞을 지날 때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하자 말베드로가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답한 부분이 생각났다. 나는 매일, 어디에서, 얼마나 자주 예수님을 모른다고,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지?     자녀 이름을 지을 때 이름처럼  존귀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이름을 잘 지었다고 사람이 존귀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귀한 삶을 살 때 그 이름이 존귀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좁게는 가정에서, 넓게는 사회와 국가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분들이 좋은 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위해 순교하신 분들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그들처럼 살 수는 없다. 다만 지금 내게 주어진 환경 안에서 아주 작은 것부터 귀한 일을 행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성직자의 입장에서도 훗날 내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욕되지 않게 사는 길을 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변성수 / 교도소·사역 목사열린광장 이름 의미 자녀 이름 예수 그리스도 식인 직장

2023-11-13

목회칼럼 / 신약의 인물탐구 - 빚진 자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이 구절은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빚진 자에 대한 비유 말씀입니다. 여기에 ‘빚 주는 사람’은 ‘다네이스테스’로 ‘돈을 빌려주는 사람, 채권자’입니다. 여러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친분에 의해서 돈을 빌려주게 된 사람이 아니라 돈을 빌려주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한 사람에게는 ‘오백 데나리온’, 다른 한 사람에게는 ‘오십 데나리온’을 빌려주었습니다. 여기에 ‘데나리온’은 당시 로마 제국의 화폐 중에 하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화폐 개혁을 일으킬 때까지 로마에서 중요하게 통용되는 화폐 중에 하나였습니다. 흔히 1데나리온을 당시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당시 시기와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대개 그 정도의 가치였습니다. 그런데 일당이 현대의 일당의 가치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오늘날의 일당으로 환산을 한다면 $100 정도가 됩니다. 그러나 당시의 노동자의 일당은 밥 세 끼를 겨우 먹을 수 있는 돈으로 지금으로 한다면 $30도 안 되는 돈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500데나리온은 그런 노동자가 500일을 꼬박 일해서 모아야 하는 돈입니다. 그리고 50데나리온은 50일을 일해서 모을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런데 이 두 채무자가 모두 ‘갚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여기에 갚을 것에 해당하는 단어가 ‘아포디도미’로 사용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다, 포기하다, 지불하다’의 뜻입니다. 즉, 갚을 여유가 없다는 표현과 함께 지금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모두 포기해도 갚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의미입니다. 여윳돈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재산을 다 포기해도 갚을 수 없는 상황인 겁니다. 그런데 채권자는 이들에 대해서 채무를 면제해 줍니다. 성경에는 ‘탕감해 주었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원어는 ‘카리조마이’인데, ‘거저주다, 은혜를 베풀다, 용서해 주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혜를 베풀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빚에 대해서 모두 대신 지불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시몬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당연하게 더 많이 빚진 자가 더 고마워하고, 더 사랑할 것이라는 것이 시몬의 대답입니다. 물론 우리도 시몬과 같은 대답을 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500과 50의 차이는 대단합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시몬의 대답을 정답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빚진 자’에게 있습니다. 한 사람은 500데나리온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50데나리온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누가 더 능력이 없는 사람일까요? 5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입니다. 그 마저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빚진 자’는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50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은 빚을 탕감을 받은 후에 그의 수중에는 얼마의 돈이 있을까요? 반면에 5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은 빚을 탕감 받은 후에 그의 수중에 얼마가 남아 있을까요? 이 말씀은 죄에 대한 용서를 받은 자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러면 누가 더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을 더 사랑할까요? 아주 많은 죄를 지은 사람, 아주 심각한 죄를 지은 사람이라는 결론입니다. 그런 사람이 죄에 대해서 용서를 받은 것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닌 죄를 지은 사람은 용서함을 받은 후에 덜 사랑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심각성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심각하다, 대수롭지 않다는 기준을 하나님은 매겨 놓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이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인 죄가 더 심각합니까? 아니면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은 죄가 심각합니까? 그 대가로 일어난 일들을 보면 더 심각하고, 덜 심각한 것을 나누기 어려울 정도로 모두 심각한 징계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심각한 죄만을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있는 모든 죄가 심각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대신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짓말 좀 한 것과 사람을 죽인 것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심각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500데나리온을 빚졌는가? 아니면 5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인가? 를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빚진 자’임을 바로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 갚지 못할 심각한 빚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서 탕감을 받게 되었는가? 이것을 바로 아는 사람이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건, 교회에 실망을 해서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건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죄’에 대해서 스스로 등급을 매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것은 좀 낮은 등급, 누구는 높은 등급의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판단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A등급이상의 심각한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그 심각함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용서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감사할 줄 아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12월 성탄절. 우리의 이 심각한 상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바로 알고 감사하며, 찬양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목회칼럼 인물탐구 예수 그리스도 화폐 개혁 당시 노동자

2022-12-23

[삶의 뜨락에서] 스쳐 간 옷깃

오래전 이야기지만, 내 친구 한 사람이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아는 여자를 만났다. 아는 여자라는 표현이 어색하지만 글자 그대로 아는 여자일 수도 모르는 여자일 수도 있는 그런 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학 신입생 시절 미팅이라는 교제의 시간에 파트너가 되었던 여자였다. 그때는 별다른 사연도 느낌도 없이 그 시간이 끝나고 남남이 되었던 사이이니 그냥 한번 얼굴 마주한 사람인데 우연히 만난 그 시간에 다시 인사하니 또 다른 분위기가 만들어졌던 모양이다. “다시 보니 괜찮은 거 있지.” 그렇게 교제가 시작되어 결국은 결혼까지 하고 지금까지 잘살고 있다. 살아간다는 것이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것의 연속이지만 만나는 사람을 어떤 눈길로 바라보는가에 따라 동행하는 사람이 되고 그저 스쳐 간 행인이 된다.     스치고 지나갈 사람이 장미의 가시로 남았다는 대중가요도 있지만 무심히 지나 보낸 기억도 없는 사람이 어느 날 같은 길에 들어서서 인사를 한다. 누구신가 기억을 더듬어 찾아보면 낯선 얼굴이지만 낯익은 얼굴로 다가온다. 어느 시간 속 어느 장소에서 같이 있었던 그림이 찾아낸 번호표처럼 깜짝 떠오른다. “아 그때 옆에 있었던 사람” “이제 기억나세요” 다시 시작하는 대화로 가까워지고 친해지고 기분 좋게 동행한다.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며 지내는 지금의 사회생활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넉넉한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한다. 이쪽의 옅은 관심만큼 저쪽의 관심 또한 약할 수밖에 없다. 진심을 담은 시선으로 보면 좋은 관계일 수 있는 사람들이 그저 스쳐 지나가버리고 마는 아까운 경우가 많은 군중 속에 고독이라는 약간 슬픈 현실이다.   동그란 사람을 기다리는 이에게는 세모난 사람, 네모난 사람, 마름모꼴 사람 등 다른 모양의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미가 없으므로 그들과의 만남도 의미 없는 물리적 접촉에 불과하다. 오랜 시간 어렵게 참아낸 뒤 만나게 된 동그란 사람은 그 손가락 끝의 작은 부딪힘도 큰 불꽃으로 나타난다. “이런 사람 없을까” 기다리던 사람에게는 세상이 아무리 작게 보는 사람이라도 가장 크게 보이는 '이런 사람' 이기 때문에 그 만남은 우주에 기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무한한 공간 우주 속에서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하나로 만나는 시간과 공간의 어느 지점에 함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만남이 바꿀 수 없는 큰 의미를 지닐 때 신기한 만남의 의미로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기적을 행하던 예수 그리스도가 군중 속을 걷고 있었다. 문득 멈추어 선 그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누가 내 몸에 손을 대었다. “이 많은 사람이 함께 가는데 한두 사람이 스승님의 몸에 손을 대었을까요.” 제자들의 무심한 대답에 “아니다. 그런 무의미한 접촉이 아니고 누가 나의 옷깃을 깊은 믿음을 실어 간절한 마음으로 손을 대었다.” 그러자 한 여자가 나와 고백한다. 오랜 병마에 고생하던 그가 예수의 명성을 듣고 살짝 예수의 옷깃만 스쳐도 병이 나을 것이라 믿고 감히 손을 대었다는 말을 듣고 예수는 말했다. “너의 그 믿음으로 너는 병을 치유하고 네 삶은 구원을 받게 되었다.” 그 시간 많은 사람이 예수와 몸이 닿았고 스쳤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그 여자는 우주의 기적을 만나게 되었다.   지금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귀중한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의미 때문에 또 오랜 격리 상태 후에 해방감에서도 많은 인위적인 만남의 기회를 만들어내고 있다. 특히 예전에는 은밀히 이루어지던 남녀 만남의 기회조차 방송에 공개적으로 개방하여 보여주는 것도 있을 만큼 옛날 말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그저 딱하게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어떤 모양으로 지나쳐가던 그 옷깃은 역시 크게 귀중할 수 있는 까닭에 눈을 크게 깨끗이 뜨고 지혜를 담은 시선으로 찾아다니던 자기의 옷깃에 기적을 그려내는 것이 더욱 가치를 갖게 되었다. 안성남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옷깃 예수 그리스도 공간 우주 의미 때문

2022-11-18

[삶의 뜨락에서] 스쳐 간 옷깃

오래전 이야기지만, 내 친구 한 사람이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아는 여자를 만났다. 아는 여자라는 표현이 어색하지만 글자 그대로 아는 여자일 수도 모르는 여자일 수도 있는 그런 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학 신입생 시절 미팅이라는 교제의 시간에 파트너가 되었던 여자였다. 그때는 별다른 사연도 느낌도 없이 그 시간이 끝나고 남남이 되었던 사이이니 그냥 한번 얼굴 마주한 사람인데 우연히 만난 그 시간에 다시 인사하니 또 다른 분위기가 만들어졌던 모양이다. “다시 보니 괜찮은 거 있지.” 그렇게 교제가 시작되어 결국은 결혼까지 하고 지금까지 잘살고 있다. 살아간다는 것이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것의 연속이지만 만나는 사람을 어떤 눈길로 바라보는가에 따라 동행하는 사람이 되고 그저 스쳐 간 행인이 된다.     스치고 지나갈 사람이 장미의 가시로 남았다는 대중가요도 있지만 무심히 지나 보낸 기억도 없는 사람이 어느 날 같은 길에 들어서서 인사를 한다. 누구신가 기억을 더듬어 찾아보면 낯선 얼굴이지만 낯익은 얼굴로 다가온다. 어느 시간 속 어느 장소에서 같이 있었던 그림이 찾아낸 번호표처럼 깜짝 떠오른다. “아 그때 옆에 있었던 사람” “이제 기억나세요” 다시 시작하는 대화로 가까워지고 친해지고 기분 좋게 동행한다.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며 지내는 지금의 사회생활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넉넉한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한다. 이쪽의 옅은 관심만큼 저쪽의 관심 또한 약할 수밖에 없다. 진심을 담은 시선으로 보면 좋은 관계일 수 있는 사람들이 그저 스쳐 지나가버리고 마는아까운 경우가 많은 군중 속에 고독이라는 약간 슬픈 현실이다.   동그란 사람을 기다리는 이에게는 세모난 사람, 네모난 사람, 마름모꼴 사람 등 다른 모양의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미가 없으므로 그들과의 만남도 의미 없는 물리적 접촉에 불과하다 오랜 시간 어렵게 참아낸 뒤 만나게 된 동그란 사람은 그 손가락 끝의 작은 부딪힘도 큰 불꽃으로 나타난다. “이런 사람 없을까” 기다리던 사람에게는 세상이 아무리 작게 보는 사람이라도 가장 크게 보이는 “이런 사람” 이기 때문에 그 만남은 우주에 기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무한한 공간 우주 속에서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하나로 만나는 시간과 공간의 어느 지점에 함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만남이 바꿀 수 없는 큰 의미를 지닐 때 신기한 만남의 의미로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기적을 행하던 예수 그리스도가 군중 속을 걷고 있었다. 문득 멈추어 선 그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누가 내 몸에 손을 대었다. “이 많은 사람이 함께 가는데 한두 사람이 스승님의 몸에 손을 대었을까요.” 제자들의 무심한 대답에 “아니다. 그런 무의미한 접촉이 아니고 누가 나의 옷깃을 깊은 믿음을 실어 간절한 마음으로 손을 대었다.” 그러자 한 여자가 나와 고백한다. 오랜 병마에 고생하던 그가 예수의 명성을 듣고 살짝 예수의 옷깃만 스쳐도 병이 나을 것이라 믿고 감히 손을 대었다는 말을 듣고 예수는 말했다. “너의 그 믿음으로 너는 병을 치유받고 네 삶은 구원을 받게 되었다.” 그 시간많은 사람이 예수와 몸이 닿았고 스쳤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그 여자는 우주의 기적을 만나게 되었다.   지금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결국 귀중한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의미 때문에 또 오랜 격리 상태 후에 해방감에서도 많은 인위적인 만남의 기회를 만들어내고 있다. 특히 예전에는 은밀히 이루어지던 남녀 만남의 기회조차 방송에 공개적으로 개방하여 보여주는 것도 있을 만큼 옛날 말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그저 딱하게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어떤 모양으로 지나쳐가던 그 옷깃은 역시 크게 귀중할 수 있는 까닭에 눈을 크게 깨끗이 뜨고 지혜를 담은 시선으로 찾아다니던 자기의 옷깃에 기적을 그려내는 것이 더욱 가치를 갖게 되었다. 안성남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옷깃 예수 그리스도 의미 때문 공간 우주

2022-11-14

[시조가 있는 아침] 벽오동(碧梧桐) 심은 뜻은

  ━   벽오동(碧梧桐) 심은 뜻은     무명씨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렸더니   내 심은 탓인가 기다려도 아니온다   무심한 일편(一片) 명월(明月)이 빈 가지에 걸렸어라   - 병와가곡집   봉황(鳳凰)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   봉황은 상서로운 길조(吉鳥)다. 대통령 휘장으로도 쓰인다. 성인군자가 나타날 때만 오동나무 동산에 나타난다는 전설이 있다. 푸른 오동나무를 심은 뜻은 봉황새가 와서 깃들기를 바라는 것이었는데, 부덕한 내가 심은 탓인지 기다려도 아니 오고 무심한 한 조각 밝은 달만 빈 나뭇가지에 걸렸구나.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시조의 작자는 어지러운 현실을 구원해 줄 성인군자가 출현해 주기를 고대하며 준비하고 있지만, 성현은 아니 오고 한 조각 무심한 달빛만 비치고 있으니 그것은 당초에 부질없는 꿈이었던가? 혼탁한 이 시대, 지금도 이러한 심경으로 어지러운 현실을 탄식하며 진정한 지도자를 기다리는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시가(詩歌) 박씨본(朴氏本)에는 이세보(李世輔)가 지은 유사한 작품이 전한다.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 올까 하였더니   봉황은 아니 오고 오작(烏鵲)만 날아든다   동자야 오작 날려라 봉황 오게   기다리는 봉황은 아니 오고 까마귀와 까치만 날아든다니, 지금 우리의 현실에는 이 노래가 오히려 더 어울릴 듯하지 않은가?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을 앞두고, 더욱 우리의 가슴을 치는 노래라고 하겠다. 유자효 / 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벽오동 오동나무 동산 예수 그리스도 대통령 휘장

2022-10-13

[등불 아래서] 바른 것은 아름답다

 'orthodox'는 정통을 말한다.     옳다 혹은 바르다는 'ortho'와 견해를 의미하는 'doxa'의 합성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옳은 견해나 믿음을 뜻한다. 오늘날처럼 절대적 진리보다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보는 시대에서 정통이란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단어일 것이다.   과거에 정통은 경건 믿음 헌신과 함께 어울렸지만 지금은 독단 관습 권위 기득권 같은 말들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옳은 길이라는 말이 틀린 길을 전제하고 있으니 정통은 태생이 좀 교만해 보인다. 생각해 보면 정통에 대한 거부감은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라는 말이나 태도가 큰 몫을 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힘을 얻는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른 것만은 아니다. 옳고 틀린 길 역시 존재한다. 비록 어떤 분의 말처럼 그 길을 투표로 결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정의를 공동체가 만들어가든 개인에게 모두 맡기든지 옳은 길을 결정해야 한다.     신앙이란 옳은 길을 정해놓고 가자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옳은 길을 결정하는 내가 누구인가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다양하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두가 각자의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정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자신이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단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정통일 뿐이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가 가진 확신이 아니라 질문이다. 내가 정통인가 내 견해는 완전하고 안전한가 그리고 우리는 어느 누구도 정통이 될 수 없다는 진실을 알게 된다. 믿음은 내가 정통이라는 자랑이 아니라 나는 정통이 아니라고 겸손해지는 것이다. 참된 정통은 내가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옳으시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나를 부인한다. 내가 옳다고 여기던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다. 믿음은 내가 정통이 아니라는 것을 계속 기억하는 것이다. 성경을 공부할수록 교만한 나를 알아가며 기도에 힘쓸수록 연약한 자신을 발견한다. 끊임없이 내가 '사이비'라는 사실을 알고 주님이 '정통'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주님의 은혜라".   이때 바른 믿음은 아름다운 향기를 뿜는다. 치아를 바르게 하는 일은 치아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내가 아니라 정통이신 예수님이 사신다. 누군가의 말처럼 비로소 우리는 신앙을 지니지 않은 어떤 사람들에게 그들이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성경이 되는 것이다.     sunghan08@gmail.com 한성윤 /목사ㆍ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정통이신 예수님 경건 믿음 예수 그리스도

2022-03-21

[등불 아래서] 슬퍼하지 말고 땅을 돌보라

 봄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무섭게 여름이 지척이다.     그래서인지 심심찮게 나무 심는 모습을 보게 된다. 누구나 처음 심은 나무에게 사랑을 쏟는다. 물을 주고 비료를 준다. 잘 자라지 않는듯하면 비료를 더 넣고 물을 더 준다. 이 당연한 일이 당장은 도움 같으나 오히려 해가 될 때가 더 많다는 것을 키워본 사람들은 안다. 현명한 농부들은 나무를 사랑하는 길은 땅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당장 나무만을 생각해서 땅에게 소홀하면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나무는 약해지고 아무리 좋은 비료를 넣어주고 물을 주어도 자라지 못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이 침체했다고 느끼면 당연하게 자신을 개발하고 자신을 치료하려고 한다. 신자들도 더 열심을 부려 자신에게 투자한다. 말씀을 더 먹고 더 기도한다. 열심으로 교회 일에 힘을 쏟는다. 효과가 보인다. 성경 지식이 늘어나고 기도에 응답도 있고 봉사하면서 마음에 만족이 오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차가워지는 열심과 불만이 생기는 봉사 지쳐버리는 기도에 여전히 제자리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길은 기도하는 나 성경 읽는 나 봉사하는 나에게 관심과 열심을 쏟는 것이 아니라 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이 적들에 둘러싸여 힘들 때 곁에 있던 이들이 말했다. 당장 어떡하든 적의 화살부터 피하고 보라. 땅이 흔들리는 마당에 의로운 삶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 그때 다윗은 말한다. 내 피난처가 하나님이신데 내가 어찌 다른 곳을 찾겠는가. 하나님은 의인을 찾으시는데 잠시를 위해 영원을 포기하겠는가.   요즘 우리는 수많은 적을 만난다. 코비드도 적이고 경제도 적이고 사회와 정치도 적투성이다. 언제나처럼 나 자신도 적이다. 코비드만 끝나면 돈이 주머니에 생기고 정치만 안정되면 가정이 편안하면 우리는 정말 괜찮을까. 아니 모든 것이 흔들리고 적이 강해 보일수록 우리가 뿌리박고 있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힘이며 안전이고 소망이라는 것에 우리의 모든 마음을 쏟아야 하지 않겠는가.   온 세상은 내 아버지의 세계라. 거짓과 악이 종종 너무 강해 보여도 하나님은 여전히 왕으로 다스리신다. 선한 싸움이 아직 우리 앞에 있으니 우리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과 하늘에  모든 것을 그분 안에서 통일하실 것이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슬퍼하는가. 왕이신 주께서 다스리시니 하늘이여 기뻐하고 땅이여 즐거워하라. ('참 아름다워라' 중에서)   sunghan08@gmail.com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예수 그리스도 당장 나무 성경 지식

2022-02-14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전합니다”

굿스푼 선교회(대표 김재억 목사)가 25일(토) 애난데일 메시야장로교회 주차장에서 라티노 도시빈민들을 위한 성탄절 행사를 개최했다. 행사는 오전 9시 버지니아장로교회 강세훈 목사의 설교를 조영길 선교사가 동시통역하면서 시작됐다. 성탄절 당일임에도 그리스도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나선 봉사자들의 여러 섬김의 손길이 분주하게 이어졌다.   강 목사는 “성탄의 아침,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랑을 나눌 수 있어 감사하다”면서 “작은 섬김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의 기적이 라티노 이웃들에게 전해져 이 어려운 때를 잘 이겨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현장에 간이 진료소를 설치해 수년째 라티노 도시빈민들의 건강 검진을 해 오고 있는 김영관 내과의는 “크리스마스 최고의 선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돼 기쁘다”고 말했다.   이날의 사랑나눔 행사에서는 300여명의 라티노 도시빈민들에게 굿스푼 선교회가 준비한 무료급식 점심 도시락과 빵, 과일, 야채, 생선, 고기,  컵라면이 담긴 푸드뱅크, 겨울용 점퍼, 담요, 방역 마스크와 손 세정제 등을 배부했다. 또한 라티노 어린이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파티를 위해 함석호, 조영길 선교사가 산타로 분장해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며 즐거움을 선사했다.         이번 라티노 도시빈민을 위한 성탄절 행사에는 버지니아장로교회(강세훈 목사)에서 5천달러, 휄로십 교회(김대영 목사)와 열린문 교회(김용훈 목사)에서 각 1천달러를 후원했으며 지구촌 교회(담임 임광)가 1천3백달러 상당의 어린이 선물을 전달했다. 또한 낙스빌UMC 교회(김영민 목사)가 5백달러 규모의 그로서리 기프트 카드를 비롯해 백인 성도들이 봉사자로 참여해 힘을 보탰다.   특별히 이번 성탄행사에는 저스틴 김(11학년) 학생과 친구들이 도시빈민 돕기 후원금 마련을 위한 성탄 카드를 제작, 판매해 1천2백달러 수익금 전액을 굿스푼에 기부해 훈훈함을 자아냈다.   장두석 목사(열린문 교회)는 폐회기도를 통해 라티노 형제, 자매들이 이민의 땅, 타국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가정이 되도록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했다.     최정선 이사장은 “정성과 사랑으로 협력하는 모든 한인 교회들과 숨은 후원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 참여 단체 및 교회 봉사자들로는 굿스푼 최정선 이사장, 진순세 이사, 김진이 이사, 닥터 김영관 내과의, 버지니아장로교회, 열린문교회, 지구촌교회, 와싱턴한인교회, 낙스빌UMC 교회 등에서 한인 봉사자 35명과 백인 봉사자 8명이 함께했다.       김윤미 기자 kimyoonmi09@gmail.com그리스도 예수 예수 그리스도 사랑나눔 행사 버지니아장로교회 강세훈

2021-12-26

[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마음보를 다스리는 대안에 대하여

이미 이 땅에 없는 사람들을 생생하게 불러오는 사진이나 영상은 하나의 기적처럼 여겨진다. 19세기 초에 조셉 니세포르 니엡스가 처음으로 사진을 발명한 후 50년쯤 지난 1880년대에 그 유명한 코닥 회사가 세워졌다. 사진을 처음 접하고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했을지 상상해보기는 어렵지 않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있다는 복음 역시 처음 듣는 이들에게는 기적 이상의 내용이다.     기독교인이 되면 가장 우선적으로 변해야 하는 것이 세상을 보는 관점 즉 마음보다. 기독교인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본성에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입으로 시인할 때 갖게 되는 영성의 두 가지 본성을 갖는다. 일상생활을 할때 육신은 죄성과 약함을 포함하는 인간의 본성을 따라 살려 하고, 마음속에 있는 또 하나의 본성, 즉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신성의 영향을 받는다.   인간본성은 자신에게 집착한다. 자기본위의 사람은 하나님은 물론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 없다.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할뿐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된 것을 적대시한다. 자기 자신에게 몰두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시하며 성경은 그것을 부패한 본성이라고 지목하고 본성에 따른 육적인 삶은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경고한다. 여기서의 죽음은 모든 생명체가 경험하는 육신적인 죽음이 아니고, 영혼의 괴멸을 의미한다.   많은 이들이 이 세상이 그들에게 가르친 많은 거짓된 내용을 삶의 정석이나 진리로 알고 살아간다. 남을 따라 살면서 어떤 인생이 잘사는 인생이라는 식의 획일적 선전 즉 거짓에 기반한 판단과 생각 때문에 불행하고 불만족스럽고 혼동된 채 살아간다. 그 거짓의 내용은 이 세상에 속한 영광에 중점을 두고 있다. 사람들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무조건 더 많이 소유하고자 욕망한다. 불행하게도 욕망은 끝이 없다. 참 기독교인의 삶은 그래서 마음 속에 영적인 전쟁터를 둔 삶이다.     신약성경 27권중 무려 13권을 쓴 바울사도조차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충돌을 로마서에서 고백하고 있다:“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 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원하지 않는 생각을 차단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원치 않는 생각을 다른 생각으로 대치할 수는 있다.     신학자인 닐 앤더슨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조언을 남겼다: “오래된 불손한 생각들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도록 바꾸려고 노력하거나 좋지 않은 생각이라고 중단시킬 수는 없다. 분명하고 깨끗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채우는 일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사람이 거짓의 아비, (사탄)를 극복하는 것은 진리를 선택할 때뿐이다.” 바울사도는 로마서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의 영은 죽을 몸과는 달리 살아있게 되고, 영에 의해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는 우리에게 영적인 삶을 살수 있는 세가지 단계로, “내게 오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다. 두 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 교회이며, 함께 예배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먹으며 삶을 축하하는 친밀한 공동체를 형성할 때 의미가 있다. 그것이 교회와 일상이 조화되는 신앙생활이다. 저마다의 개성을 유지한 채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고자 노력하는 것이 신앙여정이며, 모든 크고 작은 결정은 마음속에 있는 인성과 신성의 두 가지 본성이 충돌하여 일어나는 치열한 갈등의 결과물임을 인정할 때만 건전하고 깨어있는 신앙이 된다.     19세기인들과는 달리 바람처럼 먼지처럼 사라져간 사람들의 모습과 목소리와 영상을 생시처럼 생생히 다시볼 수 있는 것을 당연시하는 현대인들처럼, 기독교인은 사람의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당연시하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믿음은 선물이며 은혜다. 아이큐에 상관없이 은혜를 사모하기를. [종려나무교회 목사, Ph.D www.palmtreechurch.org]       최선주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마음보 대안 예수 그리스도 종려나무교회 목사 생각 때문

202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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